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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근주 교수님 특강 "희망 없는 땅에 핀 긍휼과 연대의 꽃"
    조합원 함께 공간/조합원 모임, 마당, 활동 소식 2023. 8. 23. 15:32

     

    8월 22일(화) 저녁 김근주 교수님을 모시고 "희망 없는 땅에 핀 긍휼과 연대의 꽃"이라는 주제로 온라인 특강을 열었습니다. 김근주 교수님은 룻기의 내러티브 안에서 어떻게 율법이 그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관계에 맞게 해석되고 적용되는지를 살피면서, 나오미와 룻이 서로 '붙좇는' 관계로 희망이 사라진 시절을 함께 버티며 서로 사랑하며 지나간 것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룻이 나오미를 따르기로 한 용감한 선택(에쉐트 하일, 룻3:11), 그리고 그녀의 이방 여인이라는 정체성이 룻기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고찰하면서, 사사기로 대표되는 힘 가진 자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닌, 나오미와 룻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 나타나는 '긍휼과 연대'의 이야기가 어떻게 희망 없는 땅에 새로운 빛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내러티브로 표현할 수 있는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상황, 그리고 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사람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해석,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는 이해,  이러한 것들이 모여, 룻기라는 새로운 작품을 가능하게 했고, 나오미와 룻 같이 벼랑에 선 사람들로 당당하고 든든하게 자신들의 삶을 새로 시작하게 했고,  룻기라는 특별하게 중요한 책을 형성하게 했다.  그것이 룻을 가리키는 ‘에쉐트 하일’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2023년8월22일 희년함께 특강 자료.pdf
    0.30MB

     

    2023년8월22일 희년함께 특강 “희망 없는 땅에 핀 긍휼과 연대의 꽃”
    김근주(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룻기의  기반에는  기업  무르기와  형사취수  제도가  있다.  그런데  각각의  규정은  레위기  25장과  신명기 25장에 제시되며 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암시를 두지 않고 오직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면 룻기는 어떻게 이 두 규정을 묶고 있는가?

    토라의 의의
    -  토라=내러티브+율법규정

    7년의 해석
    -  오경에는  세  개의  법전이  있는데,  언약법전(출  20:22-23:33),  신명기법전(신  12-26장),  성결법전(레 17-26장)이 그것이다. 7년째에 대한 언급이 이 세 법전에 다 나타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언약법전: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1)

    신명기법전: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엔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신 15:1-3)

    성결법전: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레 25:4-7)


    -  언약법전에서는  7년마다  그  땅에서  자라난  산물을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에게  주도록  규정한다. 여기에 ‘묵히다’로 번역된 히브리말 동사 ‘샤마트’는 ‘(손을)  떼다’를 의미하는데,  이 동사는 신명기 법전에서도  쓰인다.  신명기  15:3에서  “네  손에서  면제하라”에  ‘샤마트’  동사와  함께  ‘손’이  쓰여서 ‘네 손을 떼라’는 표현이 쓰였다.  보다시피,  신명기 15장에서 ‘샤마트’는 ‘농사에서 손을 떼다’를 의미하던  언약법전과는  달리  이웃에게  빌려준  ‘빚으로부터  손을  떼다’는  의미로  쓰였다.  아예  신명기  15:1은  매  칠년째를  아예  ‘쉐미타’로  규정하는데  이  표현은  ‘샤마트’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즉 매 칠 년째는 ‘손떼는 해’, ‘면제년’이다.  그러므로 신명기법전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언약법전을 상호간에 발생한 채무 관계라는 좀 더 복잡한 경제현실로 확장해서 개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신명기법전이  언약법전을  전제한다는  것은,  ‘샤마트’  동사와  그  파생형이  쓰였다는  데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성결법전은  또  다른  방향의  개정을  보여준다.   레위기  25장에서  칠  년은  빚을  탕감하는 것과는 무관하되 농사를 쉰다는 점에서는 언약법전과 일치한다.  절로 자라난 산물이 이웃을 위해 쓰인다는 기본 방향 역시 언약법전과 일치한다.  성결법전은 절로 자라난 산물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언약법전보다는 좀 더 자세하게 서술한다.  언약법전의 “가난한 자”는 성결법전에서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로 확장되었고,  다소 막연한 “들짐승”은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으로  구체화되어  확장되었다.  성결법전  역시  언약법전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사회  관계를  배경에  두고  있으며,  2인칭  대명사의  반복적  사용은  언약법전보다는  훨씬  더 사유재산이 진전된 현실을 반영한다.  신명기법전에서 7년은 이웃에 대한 빚의 면제가 중심이지만, 성결법전에서  7년은  땅  자체가  누리는  안식이  중심이다.  특히  레위기  25장은  이  안식을  두고  ‘땅의 안식’이면서 ‘여호와의 안식’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성결법전은 언약법전이나 신명기법전보다 훨씬 더 신학화된 이해를 보여준다.

    -  이러한 규정들은 모두 일상을 살아가는 그 백성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사람 위에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바뀐다.  놀랍게도  우리의  오경은  서로  충돌되는  규정들을  어느  하나  빼버리거나  통합하지  않고  보존하였다.  그  점에서  현재의  오경  율법이  실정법이기는  어렵다.  서로간에  일치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이를 개정하거나 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종교개혁 전통은 지금은 해당되지  않고  폐지되었다고까지  표현하지만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오경에서  살인하지  말라처럼 지금도 지켜야 하는 법과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지금은 안 지키는 법을 구분하는 것은 주관적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확한 명령을 그대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취지를 모색하신다. 십계명이든 다른 오경의 율법이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규정의 취지를 내러티브와 연관하여 모색하는 것이지, 어느 법은 영원하고 어느 법은 폐지되는가를 찾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오경과 구약은 그 자체 안에서 이미 주어진 규정을 재해석하고 현실에 맞게 변화시킨다. 바뀌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 세상의 하나님 여호와 그리고 그를 경외하는 백성이다.

    룻과 나오미의 세상
    형사취수제도와 가부장제

    -  룻기의  마지막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으로  마무리된다.  결혼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를 향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더  나은  번역은  ‘꼭  맞는  도움’이다. 만일  이성간의  결혼이  결혼의  전부라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결혼  후에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혼자  사는  사람은  창조  질서를  어긴  것이  된다. 그리고 남편에게 아무런 희망을 걸지 않는 룻의 결단도 문제가 생겨 버린다.  그래서 창세기 2장 말씀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꼭 맞는  도움으로  존재한다.  집회서에  따르면,  하나님께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집회서  42:21),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24절).  그래서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25절)와 같은 언급과 더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증언한다. 만물을 두고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룬다는 언급(42:24)은 창세기의  “돕는  배필”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천하 만물은 서로 짝을 이루어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바울의 지체론(고전 12:12-26;  특히 25절)과도 연관된다.

    -  둘이 한 몸이 되었다는  말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무엇인가?  바로  룻기  1:16-17이다.  16-17절은  그야말로  사랑 고백이다. 이보다  더  진하고 깊은  사랑  고백이  있을까?  개역이  ‘붙좇다’로 옮긴 히브리말(‘다바크’)은 창 2:24에도 쓰였는데,  남자가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맥락에서 ‘연합하다’로 옮겨졌다. 룻은 나오미를 따르기로 하였고,  그녀를 붙좇았다. 룻은 나오미에게 연합하였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단순히 부부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동사는 남녀의 사랑에도 쓰이지만(창 34:3;  왕상 11:2), 왕을 향한
    백성의 연합(삼하  20:2)에도 쓰이고 무엇보다도 여호와께 대한 그 백성의 마음에 쓰인다(신10:20; 11:22; 13:5; 30:20;  수 22:5; 23:8;  시 63:8; 119:31).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도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당신이  죽는  곳에  나도 묻힐 것이라며,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으리라는 룻의 고백은 결혼의 본질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와  연대하는  세상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서로를  향한  깊은  연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다윗과 요나단이다. 사무엘상 18:1은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하였다. 여기서 “마음”으로  옮겨진  히브리말(‘네페쉬’)은  성경에서 곧잘 ‘영혼’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영혼이라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  그 사람의 생명 전부를 가리킨다. 1절을 직역하면, ‘요나단의 생명 전부가 다윗에게 묶였고,  요나단은 자신의 생명 전부처럼 다윗을 사랑하였다’이다.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처럼  여기는  삶이다. 거기에  룻과  나오미의  모습이  있고,  다윗과  요나단의  모습이  있으며 솔로몬과 슐람미 여인의 사랑이 있다.

    -  그러므로  룻기는  ‘사랑으로  결합된  가정’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룻기를  두고  보아스와  룻의  행복한  결합과  오늘의  가정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룻기의  핵심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룻기의  중심에는 나오미를 끝까지 붙좇고 헤세드를 버리지 않은 룻의 결정이 있으며,  룻을 위해 꽤나 위험스러운 계획을 지혜롭게 진행하는 나오미의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와 룻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일상적인  범주의  가정과는  전혀  다르다.  이  특이한  가정에서  룻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이른바 ‘남성’  역할을 수행한다.  룻기는 꽤나 오래된 과거를 배경으로 성과 가정에 대한 고정적인 선입견을 깨뜨린다.  부부와 두 아들로 이루어진 서두의  ‘정상적인  가정’은  결말에  가서는  전혀  하나의 가족이라 생각할 수 없는 가정으로 바뀐다(벌퀴스트, <페르시아시대의 구약성서>, 384).  처음에는 남녀의 결합,  두 아들,  두 며느리라는 전형적 가정이지만,  정작 그 힘겨운 시대 새로 시작하는 이들을 지켜낸 것은 나오미와 룻 가족,  다음에는 나이든  보아스와  젊은  룻 가족,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오벳이  포함된  가족이다.  그런데  이  오벳은  엘리멜렉을  잇는지  보아스를  잇는 지 모호하며,  정작 룻기에서는 오벳을 두고 ‘나오미의  아들’로  표현한다(룻  4:17).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나오미의 아들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전혀 혈연이 아니다.  오벳은 어려운 시대를 끝까지 신실하게 서로를 지키며 버텨낸 이들의 자손이다.  그런 점에서 룻기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는 전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룻은  특별하다.   나중에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자”라고  표현한다(룻3:11).  이 말은 히브리어로 ‘에쉐트 하일’이다.  ‘에쉐트’는 여성을 의미하고 ‘하일’은 ‘힘,  재물,  군대’를  의미한다.  이  말을  남자에게  적용할  경우  ‘남자’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이쉬’와  결합해서  ‘이쉬하일’이  된다.  룻기  2:1에서는  보아스를  가리켜  ‘이쉬  하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개역은  ‘이쉬하일’은  “유력한  자”로,  ‘에쉐트  하일’은  “현숙한  여자”로  옮긴다.  새번역은  에쉐트  하일을  “정숙한 여자”로,  가톨릭 성경은 “훌륭한 여자”로 옮긴다.  그보다 더 나은 번역은 ‘용감한 여성’  혹은 ‘용기 있는  여성’이다.   남편과  무관한  미래라는  점에서  현숙이나  정숙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룻을  표현하기  적합한  말은  무엇일까?  그의  ‘하일’은  그의  나이나  외모가  아니다.  룻기는  그의 외모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룻기가 보여주는 그의 ‘하일’은 나오미를 선택하는 연대와 긍휼,  그가 이전에 베풀던 헤세드,  낯선 땅에 와서 이삭 주으러 나가는 용기,  보아스를 향한 과감한 행동이다.

    이방 여인

    룻에게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룻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아무런  문제  없이  안착하게  된다.  이스라엘  가운데  존재하는  이방인이라는  주제는  오경과  구약에서  또  다른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이다.  에스라-느헤미야는  이  주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한쪽의 태도를 취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 가운데 설 자리가 없다.  심지어 포로를  경험하지  않고  그  땅에  머물렀던  이들조차  새로  시작하는  공동체  안에  자리가  없음을  단호하게 선언한다(스 9:1).

    그 점에서 이방 여인인 룻이 어떻게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룻기는 에스라-느헤미야 전통과 확연하게 대조된다. 그리고 룻기는 외로운 책이 아니다. 오경 율법 곳곳에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에 대한 언급들이 룻기와 주제에 있어서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살기에  ‘나그네’로  불렸고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게르’이다. 그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아예  ‘나그네’  혹은  ‘머무는  자’라는  별도의  호칭이  있다는  점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자신들과  구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경  율법은  그들을  마치  이스라엘처럼  다룬다. 레위기 19:33-34은  게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진술이기도 하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4:22은  거류민과  본토인에게 하나의 법을  적용한다고 선언하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는  표현으로  마무리하는데  이런  식의  전개는  19:34과  일치한다. 이스라엘과 게르는  야훼  신앙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에 따라 서로 하나이다.  야훼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에서 게르도 동포처럼  여김  받아야  한다는  놀라운  사회  윤리가  생겨난  것이다. 출애굽기 12:49에도  본토인과 게르가  하나의  법  적용된다는  규정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앞뒤  맥락은  유월절  준수이다(민  9:14 역시).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근본이  되는  의식에 게르도  참여할  수  있고  같은  규정에 적용된다.  물론 할례가 여전히 요구되지만,  구약의 할례는 야훼의 언약 백성이 되겠다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신앙고백에  해당한다. 오경에서  할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나오는  부분은  창
    세기 17장이다.  여기에서도 아브라함 집에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 역시 할례를 행한다(창 17:12-13).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점에서,  이방인  역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야훼  신앙은  민족을  단번에  넘어  버린다.  이러한  확장의  절정은  에스겔  47:22-23이다.  미래의  회복된  이스라엘에서  게르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  그야말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도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게르에  대한  배려가  그저  이웃을 향한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야훼 신앙과 출애굽 경험이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근본적 신앙고백에 근거한다는 점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게르에 대한 지위가 이토록 고양되는 것만이 오경 율법의 전부는 아니다.  가령,  신명기에서  게르에  대한  언급은  여러  번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  ‘자비’의  차원에서  게르를  배려하도록  요구된다(가령,  신 10:18;  14:29;  16:11;  23:7;  24:14,17,19,20,21  등).  이 점은 언약법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  22:21;  23:9,12).  게르의  지위가  격상되는  것은  위에서  본  대로,  주목할  만하게도  제사와 의례를 다루는 내용에서이다.  특히 성결법전에는 게르에 대한 언급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며,  앞서 언급한 대로, 19:33-34은 게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강력한 언급이다.  제사 제도를 다루지만 레위기 1-7장에는 게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17장 이후에야 나온다는 점에서,  게르에 대한  확장된  이해는  성결법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경  연구자들에  따르면,  성결법전은  오경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 오경 안으로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결법전 역시 제사장 계열에서 형성된  작품이되,  레위기  1-7장과  같은  본문과는  꽤나  구분된다.  에스라-느헤미야서에  게르가  단  한 번도  쓰이지  않는  것  역시  이  책의  특정한  경향을  확연히  보여준다.  에스라로  대표되는  제사장 계열의  강력한  분리주의와  배타주의를  짐작할  수  있지만,  레위기의  성결법전을  중심으로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있는 제사장 계열의 또 다른 흐름은 오늘날에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포괄주의, 보편주의를 보여준다.

    현재  우리가  지닌  오경과  구약은  성결법전과  룻기를  지니되,  ‘게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에스라-느헤미야서  역시  포함한다.  지금과  같은  오경과  구약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서로간에 충돌하고 모순되는 진술을 담은 책들을 한 바구니 안에  담아  두다.  그런  점에서  오경과  구약을  반영할  적절한  표현은  ‘다채로움’이다.  노아  홍수 후에  새로  시작하는  인간과  인간  외  생명을  향해  하나님이  보이신  언약의  증거가  무지개라는  점(창  9:12-17),  완전히  무너진  예루살렘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이  환상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무지개로  표현된  점(겔  1:28)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침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온갖 광채의 보석으로 가득한데(계 21:10-21),  이 역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채로운 하나님의 도성’일 것이다.

    게르에 대한 배려 가득한 성결법전과 게르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에스라-느헤미야가  함께  존재한다.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먼  나오미-룻  가족을  통해  룻기는  가부장제를  넘어서고, 이방여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넘어선다.  핵심이자 본질은 글자를 지키는 세상이 아니라,  당대 신앙 공동체의 현실과 위기에 대한 대응,  자유롭고 진지한 대응이다.

    왕이 없는 시대

    -  나란히  놓인  사사기와  룻기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사사기  17장부터  마지막  21장까지는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무너진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이  내용을  다루는  첫머리에  놓인  17:6과  이  내용의  마지막인  21:25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켜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평가한다(삿 17:6; 21:25).  그리고 이 다섯 장에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이고,  그로 인해 죽고 성폭행당하며 납치당하는 등,  피해를  극심하게  겪는  이들은  모두  여자들이다.   그러나  룻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이들은 여성이다.  물론  보아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준비하며  만들어  가는  이들은  나오미와  룻,  이  두  여성이다.  여성들의  걸음걸음을  통해  다윗으로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열리게 된다.

    -  왕이  없다는  말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와  결합한다.  서로  다른  소견이  충돌할  경우 미가가  겪는  어려움,  베냐민  지파  경내를  들른  레위인이  겪은  고충,  남편에  대해  여성인  그  첩이 겪은  참상,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의  전쟁,  납치당한  여성  등,  이  모든  상황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  결국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주관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소견이  지배하는  세상은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인간의  왕  여부가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왕이  존재하던  왕정기  역시  사사  시대와  한  치도  다름없이  여호와의  명령을  떠난  시대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왕은  힘  없는  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나,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고  도리어 모든  백성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삼상  8:10-17).   사사기  언급을  흔히  다윗과 연결시키지만,  왕  다윗은  제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게  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암논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다말을 짓밟고 쫓아냈으며,  이런 일을 듣고서도 다윗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사사기에서 말하며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왕이 아니다.  이 왕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야훼 하나님이시다.

    -  주목할  것은,  나오미와  룻  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였으며  때로  위험스러울  수  있는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살 길을 만들며 나간다.  이들에게 임금 같은 권위는 필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남자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며  서로를  향한  헤세드,  서로를  향한  사랑,  서로에게  대한  연대이다.  그래서 사사기가 말하는 ‘그 때에는 왕이 없으므로’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 없는 삶이다.  사사기가 말하는 ‘제  소견에  옳은  대로’는  힘을  가진  이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그들보다  힘이  약한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이용하기 위한 소견 대로를 의미한다.  결국 사사기가 말하는 왕이 없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은  서로에  대한  사랑  없는  삶,  연대하지  않는  삶이다.  나오미와  룻은  힘겨운  나날들 속에서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결론

    희년은 땅 돌려주기가 전부가 아니다.  가령,  희년의 구호인 ‘각자 자기의 소유지로’라는 구호와 비슷한  것이  에스라  2:1;  느헤미야  7:6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이  “각기  자신의  성읍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이다.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150년 가량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대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이미 그 땅에서 지난 백 년 세월 동안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하층민이었을 것이라는 점인데,  에스라-느헤미야는 이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나 언급이 없다(케슬러: 263).  돌아온 이들은 대체로 상류층이고,  남아 있던 자들은 대체로 하층민이었으니,  아마도 귀환 이후 그 땅에는 빈부의 갈등,  계급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희년의 중요한 구호인 ‘각자 자기 소유지로’는 그래서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희년의  근본은  땅  돌려주기에  있지  않고  빈곤을  대물림하는  것을  막아내고  누구라도  새로운 삶의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그래서 삶의 붕괴를 막아내는 것에 있다. 그래서  50년이라는  구조적  틀을  마련하고,  평소에는  무르기  제도를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삭 줍기와 수혼 제도도 기여한다.  이삭 줍기는 레위기와 신명기에,  형사취수 제도는 신명기에,  토지  돌려주기와  무르기는  레위기  25장에  등장.  그러나  그  전체가  어우러져  나오미와  룻이라는,  아무 기댈 곳 없는 밑바닥 인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희년법을 포함해서 구약 규례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법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가령,  룻기의 기업 무르기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 그와 합치되는 내용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형사취수  제도와  기업  무르기는  애초에  인접한  본문에  다루어지지도  않는다.  형사취수제도는  신명기의  사회법  맥락에  있고,  기업  무르기는  오직  레위기  25장의  희년  규례에만  있다.  그러나  룻기는 이  두  가지  제도를  배경에  두고  무너질  뻔  했던  가족을  지켜낸다.  룻기는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텍스트의  글자를  따라  이루어지는  법률중심  세상이  아니라,  법이  지닌  취지에  맞게  서로  떨어져  전해온  법을  연결해서  사람들을  지켜낸다.  법을  생생하게  만드는  것은  내러티브이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멋진  구호는  언제나  글자에  매인  지극히  육적인  해석에  매이기  쉽다. 룻과 나오미의 연대를 보여주는 룻기는 성경이 어떻게 생명과 자유,  해방과 회복에 기여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룻기가 기존 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 점에서 룻기는 그 분량에 비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에스라-느헤미야가 지니는 중요성에 비해,  룻기와 같은 책은 스-느의 율법에 대한 강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밝혀준다.  그리고 에스라와 토라,  율법이 연관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실상  율법  가운데  레위기  17-26장은  에스라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나게  된다.  룻기와  같은  책은  레위기  17장  이후와  잘  어울리며  야훼  신앙이  어떻게  보편주의적이고 포괄적인지를 보여준다.  그 점에서 룻기는 분량보다 훨씬 더 중요한 책이다.

    내러티브로 표현할 수 있는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상황, 그리고 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사람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해석,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는 이해,  이러한 것들이 모여, 룻기라는 새로운 작품을 가능하게 했고, 나오미와 룻 같이 벼랑에 선 사람들로 당당하고 든든하게 자신들의 삶을 새로 시작하게 했고,  룻기라는 특별하게 중요한 책을 형성하게 했다.  그것이 룻을 가리키는 ‘에쉐트 하일’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희년을 실천하는 협동조합형 대안 금융 프로젝트